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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
기사입력  2018/02/02 [15:13] 최종편집    이성관 기자

 

▲ 이성관 기자  ©경기브레이크뉴스

 [경기브레이크뉴스(안양주간현대) 이성관 기자] 수많은 언론에서 최저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노인고용문제와 영세자영업자 등의 애로사항을 예로 들어 최저임금인상이 오히려 고용을 줄이게 하고 영세소상공인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측과 임금인상 분을 정부에서 보조하고 있고 실질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최저임금인상의 수혜를 입게 된다는 말을 하는 측이다. 그러나 우리는 최저임금의 본 의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고 있지 않다.

 

 

최저임금은 1894년 뉴질랜드의 강제중재법과 1896년 오스트레일리아의 빅토리아 주 공장법에서 유래했다. 최저임금이 필요한 구조를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자. 고전경제학에서 경제주체는 자본가, 노동자, 원료이다. 자본가는 이윤을 추구하기 때문에 가능한 싼 원료와 적은 임금을 원한다. 그러나 원료가격은 자본가가 줄일 수 없다. 제품의 품질은 소비자 선택을 받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고 원료가격을 정하는 것은 시장원리이지 자본가의 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줄일 것은 임금밖에 없다. 과거에는 노동에 대한 가치를 어떻게 측정하는가 하는 것의 기준을 자본가가 마련할 수 있었다. 현대 국가에서는 노ㆍ사ㆍ정 협의체가 합의를 보아서 정해지지만 과거에는 사용자 측에서 적정선을 합의했다. 그러다 보니 자본가들의 이윤축구가 이어지면서 노동자들은 가장 좋지 않은 환경에서 최소한의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당시 노동은 제조업 기반의 단순 노동이었기 때문에 견디다 못해 노동자가 떠나더라도 노동시장에서는 얼마든지 그를 대체할 인원이 있었다. 따라서 임금은 더욱더 낮아지고, 더 저렴한 노동자를 찾기 위해 아동을 노동시장에 끌어들이는 등 병폐가 많았다.

 

 

이러한 자본가들의 끊임없는 이윤추구를 막기 위해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을 정하고 이보다 낮은 임금은 줄 수 없다고 정해놓은 것이 최저임금이다. 그렇다면 이를 정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 역시 자본가들이었다.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의 저서에는 영국의 실상이 소개된다. 자본가들은 아동노동과 장시간 노동이 노동자들의 평균수명을 채 30살도 안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노동시장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자본가들은 아동노동을 금지시키고 근로시간을 조정했으며, 최저임금을 제정했다. 장하준 교수는 이러한 과정이 자본가들이 선의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이해타산에 맞는 선택일 뿐이라고 밝혔다.

 

 

지금은 2018년이다. 그 후 최저임금에 대한 논의는 엄청난 변화를 거쳐 왔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최저임금에 대한 논의는 1890년대, 즉 19세기의 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사용자의 이윤추구를 전제로 둔 논의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수명을 늘리는 조치를 취하느냐 줄이는 조치를 취하느냐를 정하는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같은 방식의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최저임금은 최소한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언론이 전하는 메시지에 사회가 움직이는 전형적인 예이다. 보수언론은 영세소상공인을 내세워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리면 그들이 모두 사업을 포기할 것이고, 그로인해 경제가 파탄날 것처럼 떠든다. 진보언론은 그 논리에 반박하며 최저임금이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말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그 언론의 눈으로만 문제를 인식하게 된다. 최저임금의 본질은 최소한이다.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만큼의 돈을 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최소한의 기준으로 두고 그보다 더 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는 한국은행의 기준금리와도 유사하다. 기준금리는 1.5%이지만 시중금리는 그를 상회한다. 적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수십 배까지. 따라서 소위 ‘좋은 직장’이라고 할 만한 곳에서 최저임금을 책정하는 일은 없다. 그러면 아무도 그 직장에서 일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은 그 개념이 생긴 이래 계속 상승했다. 각 국의 당시 경제사정에 따라 많이 올리기도 했고, 적게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나라도 최저임금인상 때문에 경제가 파탄 난 예는 없다. 물론 극적으로 경기가 회복되고 소득위주의 성장으로 경제체제가 뒤바뀐 예도 없다. 최저임금은 단지 최소한일 뿐인데 경제전복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특히 최저임금 인상으로 노인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는 악의적이기까지 하다. 그 말의 전제는 노인들의 일이 하찮고 누가해도 그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거기다 노인들은 자기 혼자 먹고 사는 것만 해결되면 그만일 것이라는 뜻도 전제되어 있다. 아파트 경비업을 하는 노인들의 급여가 130만 원대에서 150만 원대가 되었을 때 주민들이 부담해야할 가구당 월 3000원에서 월 9000원 정도가 아까워서 그들을 해고한다는 논리는 확실히 치졸하다.

 

 

실제로 해당 아파트 주민들은 그와 같은 조치를 한 주민대표와 관리소 측을 반박하는 대자보를 붙여서 그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고, 대부분의 다른 지역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실제 주민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을 언론에서 키운 전형적 사례인 것이다.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이 최저임금인상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한 말을 들려주고 싶다.

 

 

“2015년 미국에서 한 달에 150만원(우리나라 사정으로 맞춘 금액임)으로 가족을 부양하며 살 수 있다면 한 번 그렇게 살아보시죠.”

 

 

현 시점에서 최저임금은 이윤추구의 산물이 아니라, 그 사회가 인간적인 삶의 최소한을 어디쯤으로 상정하고 있는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고 있다. 당신이 보는 인간적인 삶의 최소한은 어디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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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랭이 18/04/11 [14:17] 수정 삭제  
  많은 참고가 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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