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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프리미어 호텔 김상교 대표 인터뷰,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잘사는 정직한 세상”
기사입력  2018/04/26 [13:04] 최종편집    이성관 기자

  

 

[경기브레이크뉴스 이성관 기자] 당장 생활이 어려우면 현실과 꿈의 격차가 멀어진다. 모든 것이 풍족해 보이는 지금도 어딘가에는 다음 끼니를 걱정하며 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꾸는 꿈은 아마도 푸짐한 저녁 밥상일 것이다. 현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이 각종 복지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 굶어죽을 걱정은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복지의 사각지대는 언제나 존재하고 가난을 비관하며 생을 달리하는 사람들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흔히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구태의연하거나 뻔한 훈계로 듣곤 한다. ‘나와는 상황이 다르다, 내 삶을 몰라서 그런다’와 같은 마음이 들게 되면 애써 그 사람의 이야기를 외면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같은 이야기에서 삶의 전환을 맞이하게 되기도 한다. 이번에 만난 CS프리미어 호텔의 김상교(남, 54) 대표가 들려 준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였다.

 

▲ 선한 사람들의 장학회 활동 중인 김상교(중앙 우측) 대표    © 경기브레이크뉴스

 

 

◎ 지독한 가난

 

 

5, 60대에 자수성가한 사업가의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어릴 적 겪은 가난이다. 요즘에는 이른 바 ‘수저론’이 팽배할 만큼 계층이동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통설이 있지만 한참 성장의 과도기에 있었던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대표의 어린 시절은 과연 저런 상황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어려웠다.

 

 

김 대표는 “4평도 안 되는 단칸방에서 식구 8명이 살았다”고 운을 띄우고는 자신이 살던 난곡동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시절 난곡동은 ‘난골’이라는 지명이 있었지만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낙골’이라고 불렀다. 김 대표는 그 이유를 “망한 사람들만 들어온다고 해서 떨어질 낙(落)자를 붙여 낙골이라고 불렀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어릴 적 꿈은 지독한 배고픔 때문에 “쌀장사를 하면서 개를 키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외의 꿈을 꿀 엄두도 못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 빠른 결혼과 빠른 책임감

 

 

김 대표는 어렸을 적 주변 어른들이 가난해서 장가도 빨리 가기 힘들다고 하는 말에 빨리 결혼하는 것을 꿈으로 여기게 됐다고 했다. 또 중학교 밖에 졸업하지 않은 상태에서 형과 함께 서울역에 신문팔이를 나섰다가 아동보호소로 연행되어 구타를 심하게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당장 먹고 사는 것이 소중해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했다. 김 대표가 그 처절한 생활을 하던 시기가 겨우 17살 때였다. 김 대표는 18살에 결혼을 했고, 19살에 아이 아빠가 됐다. 빨리 결혼하겠다던 꿈을 이룬 셈이었지만 그 뒤에 찾아오는 책임감은 무거웠다.

 

▲ 좌측부터 딸, 이모(탤런트 사미자), 김 대표     © 경기브레이크뉴스


 당시 권투 선수 생활을 하고 있던 김 대표는 3전 3승 2KO의 전적을 가진 유망주였다. 그러나 그에게 쥐어진 돈은 2만 5천원이 전부였다. 그 정도의 파이트머니로는 처자식을 키울 수 없었다. 그는 바로 프로 권투 선수 생활을 접었다. 그리고 뛰어든 것이 건설현장이었고, 그 뒤로 30여 년간 같은 일에 종사했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그가 호텔의 대표가 되기까지 한 일은 열심히 일한 것뿐이었다고 한다. 특유의 오기와 실천력이 원동력이라고 말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김 대표가 말하는 ‘열심히’라는 말의 깊이는 오랫동안 그를 지켜본 이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 배움에 임하는 자세

 

 

이른 바 중졸이었던 김 대표는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학업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했지만 세상이 인정하는 것은 학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김 대표는 “지식과 지혜, 그리고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학위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며,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이 평가하는 잣대는 학위라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힘든 건설 일을 하는 와중에 공부를 시작했고, 중앙대학교 행정대학원 복지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기에 이른다. 김 대표가 공부를 시작하면서 결심한 것은 다름 아니 ‘개근’이었다. 김 대표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사업이 아무리 바빠도 수업에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는 말로 모든 과정을 함축했다. 배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근면한 자세라고 판단한 것이다. 석사논문을 마치기 전부터 김 대표는 많은 집필 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으며 본지의 논설위원으로도 활동을 하고 있다.

 

 

 

◎ 이어지는 시련, 그리고 재기

 

 

우리나라 4, 50대 이상이 가진 공통된 시련, 특히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던 사람들은 더 크게 다가왔을 시련을 김 대표 역시 겪었다. 당시는 업계 사정도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김 대표가 부모자식 간에도 해서는 안 된다는 보증을 선 것이 화근이 되어 그때까지 이뤄왔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게 됐다.

 

 

김 대표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제 좀 허리를 펴고 살만해 지는 것 같았는데, 다시 단칸방으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2002년까지 신용불량자로 살아야 했고,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김 대표는 다시 일어났고, 그 과정을 ‘열심히’라는 말로 또 함축했다.

 

▲ 김상교 대표가 이른 바 '수익형 기부'를 실현하기 위해 마련한 순대국밥집     © 경기브레이크뉴스

 

 

◎ 어려움을 아는 사람이 남을 돕는다

 

 

김 대표가 재기에 성공하여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누군가는 여전히 겪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2006년부터 조금씩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2012년에 그간 기부했던 금액을 계산해 보았다고 한다. 김 대표는 “약 1억에 가까운 돈을 기부했는데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며, “그 정도 돈을 그냥 기부하고 말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꾸준히 기부할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해 보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규모가 있는 순대국밥 전문 식당를 차리고 6명을 고용했다. 그리고 평일에 나오는 식당 수입은 운영자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고, 토요일 오찬에만 순대국밥의 가격을 3000원으로 내려서 판매하고 그날 매상 전체를 기부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6명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주말에는 싸게 시민들의 배를 채워주며, 월 150만 원 이상 기부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김 대표는 그 시스템을 자신의 호텔에 입점한 한정식 식당에도 적용했고, 기부와 수익을 함께 할 수 있는 이른바 ‘수익 창출형 기부’시스템을 만들어냈다. 김 대표는 그밖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기부를 하고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가난을 겪어 본 사람이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이 여러 곳으로 퍼지게 하기 위해 꾸준히 기부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쌀집 하면서 개 키우는 것’을 꿈으로 여기던 소년은 40년이 지나 자신의 기부행위가 여러 군데로 번지도록 하는 것을 꿈으로 가지게 된 것이다.

 

 

◎ 가족에게 김상교는?

 

 

애가 애를 낳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19살에 아이 아버지가 된 김 대표는 자식들과도 친구처럼 지낸다. 인터뷰 장소에 함께 온 둘째 딸은 아버지에 대해 “얘기를 하시는 것을 좋아해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세하게 얘기하고, 우리 의견을 묻는다”며, “가끔은 귀찮기도 하다”고 웃으며 말했다. 단칸방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가족이었으니 더 돈독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김 대표는 “사업이 바쁘더라도 가족여행을 간다”며, “가는 곳은 언제나 자식들이 원하는 곳”이라고 밝혔다.

 

▲ 둘째 딸 김효정씨의 드럼걸 공연 모습     ©경기브레이크뉴스

김 대표의 딸 김효정 씨는 평창올림픽에서도 공연을 할 만큼 유명한 ‘드럼걸’이다. 드럼켓 멤버였고 현재는 렛츠쇼와 드럼부분의 프리랜서로 활약하고있는, 딸의 공연을 보며 문화와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고 젊은이들이 마음껏 활용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여기게 됐다.

 

 

◎ 안양권역을 문화예술의 중심으로

 

 

다가오는 지방선거에 도의원에 출마하게 된 김 대표는 안양권역(안양, 군포, 의왕, 과천)을 문화와 관광에 관한 잠재력이 많다고 말한다. 김 대표는 수년 전 안양시의 관광협의체를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시 단위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는 안양권역이 이미 교통 인프라가 좋고 타 도시와의 연계를 활용한다면 관광패키지를 이용한 새로운 일자리 및 수익창출의 모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구상을 구체적으로 꿈꾸며 다시 한 번 꿈의 크기를 넓혔다.

 

 

김 대표는 인터뷰 동안 “열심히 일한 만큼 잘 사는 세상을 지향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정직한 대가가 보장되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대표가 생각하는 ‘열심히’ 정도는 어디까지 일까? 여전히 그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 대표가 꾸는 꿈은 헛말이 아니라는 것. 그의 인생에 말의 무게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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