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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력은 어떻게 뚜렷하게 증명되는가?
기사입력  2018/08/14 [17:53] 최종편집    이성관 기자

 

▲ 이성관 기자     ©경기브레이크뉴스

[경기브레이크뉴스 이성관 기자]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1심 재판이 끝났다. 그 결과는 무죄. 무죄의 결정적 사유는 위력행사 정황이 없다는 것이었다. 재판 결과로만 보자면 성폭력을 당한 사람은 없는데 고발한 사람만 있는 상황이 됐다. 이렇게 무고죄의 요건은 또다시 성립됐다.

 

 

이런 법원의 판결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판례에 따라 판결하는 법원이 이번 경우에도 판례에 따라 판결했다고 한다면 반박할 힘이 본 기자에게는 없다.

 

 

우리 법원의 판례에 따르면 성폭력이 입증되기 위해서 피해자는 완강하게 저항해야 한다. 만약 완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다면 당시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는 ‘현저하게 곤란’한 상황이어야 성폭력이 성립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상대가 무기를 들고 위협했다거나 폭력을 행사했다는 증거가 분명하지 않으면 성폭력이 성립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가 아무리 말로 정확히 거부의 뜻을 전달하더라도 결국 성관계가 이루어졌다면 강간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피해자는 어떤 상황이든 죽음을 각오하고 완강히 저항해야하고, 자신의 몸에 반드시 깊은 상처를 남겨야하며, 피해를 당한 이후 즉시 병원에서 진단서를 끊고 증거사진 등을 남겨야한다. 이는 미성년자인 피해자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만약 강간범이 법정에서 강간한 이유를 “사랑해서”라고 말하고, 상대에게 “너도 좋다고 했잖아”라고 말한다고 해도 피해자의 몸에 뚜렷한 상처가 없다면 강간범의 절규는 법관들의 마음을 울리는 사랑고백으로 변한다. 여성이 동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완강한 저항이 없다면 성폭행은 암묵적 합의에 의한 성관계가 된다. 이런 기준이 마치 일본 AV영화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본 기자뿐일까?

 

 

다행히 이런 불편함을 느낀 것이 본 기자만은 아닌 듯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나라는 UN의 인권기구에게 성폭력범죄의 기준을 다시 재정립하라는 권고를 받아왔다. 우리나라의 성폭력범죄 성립 기준이 국제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유엔에 가입된 많은 국가들은 강간죄 성립을 피해자 기준에서 바라본다. 그래서 강간의 여부는 상호동의가 전제 되었는가의 여부로 판단한다. 아주 심플한 기준이고 모호할 것도 없다. 여성이 싫다고 말했는데도 이루어진 성관계는 모두 강간이다. 만약 이런 기준이 너무 남자에게 불리하다고 느낀다면 더 이상 설득할 말이 본 기자에게는 없다.

 

 

싫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 자체가 거부의 명확한 표현이라는 것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명확한 의사표현이 강간죄를 판단하는 것에서 만큼은 모호한 표현으로 변한다. 강간을 당하고 수없이 스스로를 질책하며 자살을 기도한 피해자가 법정에 서서 듣게 되는 말이 “왜 완강하게 저항하지 않았죠?”라면,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법정에서 '암묵적 합의'의 결과로 결정된다면 그 여성은 제정신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해외의 많은 나라에서는 성교육시 강간범에 대해 완강한 저항을 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생명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자신의 거부의사를 정확히 전달한 후에도 남성이 힘을 쓴다면 그 상황은 곧바로 생명을 위협당하는 위급상황으로 변한다. 그 상황에서 격렬하게 저항하면 여성은 죽음을 맞이하거나 심한 부상을 입을 확률이 커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속한 조직내에서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도 있다. 따라서 여성은 거부의사를 분명하게 밝힌 이후에 상대를 자극할 수 있는 행위를 최대한 덜 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현실적인 길이라고 판단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나온 대처법이다. 사실 이는 연쇄살인범이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을 때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을 때 해야 할 행동과도 같다.

 

 

캄보디아에서는 한 뉴스진행자가 이와 유사한 발언을 해서 여성들에게 빈축을 산 일이 있었는데 그는 여성들에게 저항하지 말고 생명을 지키라는 말을 했지만 뉘앙스가 달랐고 그 뒤에 몇 마디를 더 붙여서 여성을 조롱하기 위해 한 말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기 때문에 비난받았다. 그가 근거로 삼은 것 역시 유럽의 성교육이었지만 그의 성인식은 그 교육을 입에 담을 수준이 아니었다. 그 앵커처럼 수준이 낮은 성인식을 가지고 있는 남성에게는 위와 같은 성교육이 걸쭉한 성적 농담의 소재로 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여성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점은 잔혹하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그동안 여러 편의 TV사극에서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은장도를 빼드는 열녀들을 봐 왔다. 이와 같은 장면은 여성들에게 강간범을 향해 죽음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이미지를 깊게 심어 놓았다. 그래서 우리의 법조문에도 ‘현저한 곤란’이라는 주관적인 문구가 들어가게 된 것은 아닐까? 실제로 1953년에는 성폭력 관련법을 ‘정조법’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또 직접적인 폭력행사가 아니더라도 여성이 자신을 강간하려는 남성에게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많고 복합적이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의 선망과 기대를 받고 있는 차기대권후보의 요구와 같이. 그러나 우리나라 법에는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를 ‘폭력’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뚜렷하고 현저한 폭력. 혹자는 그렇다면 그 복잡하고 다양한 상황을 일일이 법으로 규정할 수 없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법에 추가되어야할 문구는 단 하나이다.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는 성행위 일체를 성폭력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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